글로벌 IT 기업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하여 모바일 게임 회사로 이직해서 미국 지사 주재원으로 몇 년간 근무하다가 회사를 그만두게 되고 한 해에 팔레스타인에 두 번씩이나 다녀올 줄 몰랐지만 미국으로 돌아온 뒤 영주권이 기각되면서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더욱 몰랐습니다. 이민국의 1차 심사 의견을 받고 추가 서류를 보충하라고 하여 형식적인 일반적 절차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대학교 선배님이셨던 이민 전문 변호사님도 설마 떨어질 것이라고는 몰랐던지 매우 당황하시면서 함께 저녁식사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변호사님도 저와 같은 지사장 출신이 영주권 신청에서 떨어진 것은 본인의 변호사 기간동안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매우 미안해 하셨는데 저는 운명의 방향이 저를 한국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실리콘밸리라고 불리는 동네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전세계 최고의 인재들과 친분을 쌓고 실리콘밸리의 다양한 스타트업을 알게 되면서 앞으로 다가오게 될 IT 트렌드를 알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눈 떠보면 어느 스타트업이 벤처투자사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투자를 받았다는 뉴스와 어느 대기업에 인수되었다는 소식 그리고 기업공개 (IPO)를 하여 대박을 냈다는 소식이 넘쳐나는 곳이었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함께 비즈니스 미팅을 하던 창업자가 테크크런치(Tech Crunch)기사에 나오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곳으로서 IT 분야의 중심에 와 있는 듯 했습니다. 또한 신규 디지털 기기가 출시되기 전부터 사전에 미리 게임 앱을 테스트하기 위해 신규로 출시한 최신 기기들을 미국 지사에서 사용하거나 한국의 본사로 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애플(Apple)사의 아이패드(iPad)가 나오자마자 10대를 구매하여 본사로 보내고 한 대를 가지고 한국에 출장을 왔다가 지하철에서 아이패드를 꺼내자 주변의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봤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한국으로 가족과 함께 귀국한 2015년은 ‘‘창조경제’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창업 지원 센터를 설립하고 정부의 모든 부처가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미션을 갖게 되면서 수많은 정부 지원 프로그램이 만들어 진 해였습니다. 저는 전국 17개의 지원 센터 중 판교에 위치한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에 입사했는데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일들을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니 제가 스타트업계로 오게 된 것은 기가 막힌 우연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팅이라는 사업 분야 자체가 한국에서는 생소했고 관련법도 막 만들어진 시점이라 관련된 사업을 하는 회사가 별로 없던 시절에, 갑자기 정부에서 ‘창조 경제’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부의 모든 조직의 목표와 방향을 스타트업 지원으로 집중하면서부터 갑자기 많은 인력과 스타트업 전문가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은 노하우가 필요한 전문 영역인데 갑자기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지원 프로그램을 급조해야 하는 것이 문제였고 그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들이 너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의 경우, 경기도에서 파견 근무 나온 일반 행정직 공무원들과 KT의 태스크포스(Task Force) 팀이 함께 팀을 조직하고 운영 업무를 하도록 하면서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담당자는 채용했는데 제가 그 중 한 명으로 채용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저는 왜 저같은 사람을 찾아서 채용했을까 궁금했는데 혁신센터에서는 스타트업을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시키는 노하우가 필요했었고 저는 팔레스타인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를 거쳐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 상황에서 스타트업 네트워킹 모임에 나갔다가 혁신센터와 연결이 된 것입니다.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저는 한국 스타트업들의 글로벌 진출 및 글로벌 스타트업들의 한국 진출을 돕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여러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 및 데모데이(Demo Day) 그리고 전시회 등을 기획하고 운영했는데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VR(Virtual Reality) 영화제입니다. 페이스북(Facebook)이 오큘러스(Oculus) VR 헤드셋 기기회사를 인수한 후 VR 시장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많은 VR 콘텐츠들이 제작되었지만 하드웨어 기기가 비싸기도 하고 쉽게 접할 수 없다는 점을 착안하여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1층에 VR 체험관을 만들고 VR 콘텐츠를 체험해 볼 수 있는 VR 영화제를 유치하였습니다. 칼리도스코프(Kaleidoscope)라는 VR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의 월드 투어를 한국에 유치하여 1,000명 이상 방문한 행사를 개최했는데, 오큘러스 리프트(Rift) 기기와 HTC 바이브(VIVE), VR 촬영 전용 360도 카메라 등을 시연하면서 다양한 독립 VR 영화 콘텐츠를 상영하고 그 중 바닷속 3D 실사 영상을 바탕으로 제작한 아웃오브더블루 (Out of the Blue) 작품의 소피 안셀(Sophie Ansel) 감독을 초청하여 VR 영화제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습니다.

경기도에서 주최한 게임창조오디션 행사에도 과거 모바일 게임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글로벌 퍼블리셔들을 심사위원으로 초청하여 국내 인디 게임 회사들에게 글로벌 진출의 기회를 제공하였고,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와디즈와 협력하여 온라인 상에서 유저들이 사전 구매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여 인디 게임들에 대한 투자와 홍보를 동시에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오디션 프로그램 진행 과정에서도 현직 뉴스 앵커를 초빙하여 전문적으로 피칭 훈련을 시켜서 개발자 출신의 창업자 대표님들이 공개 오디션이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무대에서도 떨지 않고 발표를 할 수 있게 했던 것도 참여자들의 좋은 피드백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게임 오디션의 컨셉에 맞도록 게임 코스프레 팀들을 초청하여 무대에서 멋진 공연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국의 유망 스타트업들을 대상으로 미국 실리콘밸리에 함께 방문하는 맞춤형 프로그램도 기획하고 직접 인솔하였는데, 전에 제가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할 때도 이런 유사한 견학 프로그램이 너무 많았고 주로 글로벌 탑브랜드의 회사들에만 집중되어 있거나 그나마 한국어가 가능한 한국계 직원들에게만 집중된다는 것을 알고 저는 제가 자문하는 테크 스타트업이나 친분이 있었던 미국 스타트업들을 위주로 견학 프로그램을 기획했었습니다. 마치 유명 인기 리얼리티 프로그램 ‘정글의 법칙’의 족장처럼 저도 창업자 그룹을 인도하여 실리콘밸리에서 생존한 경험을 공유하고 스타트업 멘토링을 업으로 하는 은퇴한 기업가들이 아닌 창업을 직접 해 봤거나 현직 창업자들과 벤처 캐피탈리스트들을 스타트업 멘토로 섭외하여 좀 더 생생한 조언을 듣는 기회를 마련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당시 첫 탐방 일정으로 삼성전자가 실리콘밸리에 2억5천만달러를 투자하여 설립한 삼성리서치아메리카 (Samsung Research America)에 방문하였는데, 삼성리서치아메리카는 삼성전자의 제품 신기술 개발을 위한 여러 연구부서 외에도 글로벌혁신센터라는 조직을 통해 여러 혁신적인 스타트업에 투자를 하고 있었습니다. 캠퍼스 안내 매니저의 친절한 소개로 시작하여 GIC(Global Innovation Center)에서 투자를 담당하는 구글 엔지니어 출신이자 벤처캐피탈리스트 경험이 있는 아밋 가그(Amit Garg) 수석 매니저는 실리콘밸리에서 삼성전자가 어떻게 최고의 인재를 끌어 모으고 그런 인재를 활용해 많은 혁신적인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었고, 삼성전자 비주얼 디스플레이 사업부의 신기술을 소싱(Sourcing)하는 리처드 전(Richard Chun) 수석 매니저는 ‘스타트업 국가 (Startup Nation)’ 책을 선물해 주시면서 자신의 실리콘밸리 경험을 한국 창업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한 이그나이트엑셀(IgniteXL)이라는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를 창업한 클레어 장(Claire Chang) 대표님을 만나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문화에 대해 강의를 들었는데, 대표님은 이미 많은 한국 스타트업들을 실리콘밸리로 데려오기 위해 많은 한국 정부 기관들과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의 실시간 위치를 공유하는 위치기반서비스(LBS·Location Based Service) 앱을 개발한 프랑스 스타트업, 젠리(Zenly)라는 스타트업의 미국 사업총괄 담당을 만났는데 이후 젠리가 한국 서비스를 위해 위치기반서비스 사업자 등록서류 작업을 제가 도와주면서 인연이 이어졌고 2017년에 미국 인기 소셜앱, 스냅챗(Snapchat)에 2천억 규모로 인수되는 과정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둘째날에는 구글(Google) 본사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근무하시는 김진호(Jinho Kim) 박사님을 만나기 위해 구글 마운틴뷰(Mountain View) 사무실을 방문하여 타운홀(Town Hall) 미팅 장소를 비롯한 구글 시설을 견학하면서 구글의 개방적인 조직 문화를 배우고, 창업을 준비 중인 실리콘밸리의 연쇄 창업자, 폴 킴(Paul Kim) 대표님을 만나 그의 딸이 다니는 축구 클럽의 스포츠 코치들이 경기 일정을 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서비스를 설명하며 어떻게 이 틈새시장을 큰 시장으로 만들고 싶은지를 공유했는데 한국 창업자들은 작은 필요에서부터 사업화를 하는 창업자의 접근 방법에 놀라워했습니다. 이외에도 지금은 한국 최대 애드테크(Ad Tech) 스타트업으로 성장한 몰로코(Moloco)에도 방문했는데, 이 스타트업은 구글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던 안익진 대표가 팔로알토 (Palo Alto)에서 창업한 스타트업으로서 그 당시 안대표님은 한국 출장중이라서 다른 공동창업자를 만나 서로 시너지를 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니버시티 애비뉴(University Ave)에 위치한 파리바게뜨에서 앱 개발자를 위한 HTML5 개발 툴을 제공하는 스페인 스타트업, 루데이(Ludei)의 대표이자 연쇄 창업자인 에네코 노르(Eneko Knorr) 대표를 만나서 스페인에서부터 실리콘밸리로 이어지는 스타트업 여정과 아시아 VC들로부터 투자금을 모으기 위해 노력한 생생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마지막 스타트업 탐방 일정으로 제가 한국에 지사를 설립할 때 자문했었던 안드로이드 앱 가상화 기술을 기반으로 한 모바일 마케팅 스타트업, 블루스택 (Bluestacks) 본사에 방문하여, 존 가르지울로(John Gargiulo) 이사로부터 회사의 핵심 가치인 드라이브(Drive), 겟잇(Get It), 스마트 &험블 (Smart & Humble)을 중심으로 핵심 기술과 글로벌 운영을 바탕으로 블루스택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들으며 미국, 인도, 중국, 한국, 유럽 주요 도시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글로벌 스타트업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탐방 3일차는 현지 벤처캐피털 위주로 일정을 잡고 KIC(Korea Innovation Center) 실리콘밸리 사무소를 찾아 KIC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을 운영중인 담당자와와 면담을 하고, 전 SK텔레콤벤처스(SK Telecom Ventures) 원장을 지낸 션 류(Sean Ryu)를 만나 VC들이 어떻게 스타트업을 찾고 평가해 최종적으로 투자하는지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배웠습니다. 그는 실리콘밸리는 경쟁이 매우 치열한 시장이기 때문에 한국의 스타트업들은 우선 제품과 서비스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이후 제가 한국에 돌아와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에 입사하기 전까지 5년간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할 때 매일 출퇴근하던 스톰벤처스(Storm Ventures) 사무실로 이동하여 산업은행에서 파견나와 있던 서성훈 산업은행 수석을 만나 한국과 미국 벤처캐피탈 간의 문화 차이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탐방 일정의 하이라이트로 실리콘밸리의 자수성가 셀럽이 된 전 구글 엔지니어, 차드멍탄 (Chade-meng Tan) 대표와 만났는데, 과거 구글 본사를 찾은 많은 유명인사들과 사진을 찍으면서 더욱 유명해진 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를 직접 만나 SIY리더쉽연구소 (Search Inside Yourself Leadership Institute)와 10억 평화실천재단을 설립하게 된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유명인사도 아니었기에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그와 함께 사진을 찍으며 실리콘밸리 방문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한편, 스타트업 지원 건수나 투자 유치 규모 등을 평가 지표로 놓고 그 기준에 맞추려다 보니 스타트업들의 지원 실적과 투자 유치 실적을 지원 센터의 실적으로 중복 인식하거나 이미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을 거꾸로 보육 기업으로 둔갑시키는 주먹구구식의 행정으로 숫자와 실적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일도 있었고, 스타트업들 중에서는 여러 지원 센터에서 중복으로 프로그램 지원을 받고 실적도 각 지원 센터에서 챙겨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2017년 3월 10일, 대한민국 역사상 현직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통해 탄핵이라는 심판을 받게 된 날,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의 직원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지고 곧 센터는 문을 닫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해 계약 종료로 6월에 퇴사를 하면서 창조경제의 짧았던 2년 간의 부흥과 쇠락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권력의 허망함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몇 년만에 비즈니스 미팅으로 다시 방문했던 혁신 센터는 방문자가 뜸한 지원 센터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1층에 설치했었던 VR 체험 데모룸은 다시 회의실로 변경되고 많은 스타트업 데모데이와 행사가 줄을 이었던 1층 코워킹 스페이스는 불이 꺼져 있어서 매우 적막했습니다. 창조경제라는 정치적 캠페인 구호도 사라지고 박근혜 대통령은 사상 초유의 탄핵 심판을 받으면서 실패한 정권으로 남게 되었지만 그 이후로 스타트업에 대한 지원과 관심은 더욱 많아지게 되어 이제는 많은 유니콘 스타트업들이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뛰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스타트업 생태계에 초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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